요즘 따라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어느 날은 지갑을 찾느라 온 집안을 뒤졌는데, 한참 뒤에 뒷주머니에서 발견한 적도 있어. 웃어 넘기 긴 하지만, 가끔은 걱정이 되기도 해. 그러다 어제 Still Alice를 다시 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지갑을 잃어버리는 건 괜찮아. 그런 건 없어져도 큰일이 아니야. 물론 당첨된 복권이 들어 있지 않다면 말이지. 하지만 이 영화는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게 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지를.
이 영화 속 줄리안 무어(Julianne Moore)가 연기하는 앨리스(Alice Howland)는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야. 명문 컬럼비아 대학의 언어학 교수, 지적이고 자존감도 높고, 멋진 남편과 사랑스러운 세 아이까지. 그런데 이런 그녀가 50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조기 발병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면서, 모든 것이 조금씩,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지.
The art of losing isn’t hard to master;
so many things seem filled with the intent
to be lost that their loss is no disaster.

줄리안 무어는 이 역할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정말 받을 만해. 숨 막힐 정도로 섬세한 연기를 보여주거든. 처음에는 그냥 건망증인 줄 알았던 게 점점 심각해지고, 단어가 떠오르지 않다가,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결국엔 가족들의 얼굴과 이름까지 희미해지는 과정이 너무 현실적으로 그려져서 가슴이 먹먹해지지. 무엇보다 스스로 그 변화를 인지하면서 어떻게든 기억을 붙잡으려 애쓰는 모습이 안타까워.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고 단어 게임을 하고,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심지어 기억이 더 흐려지면 스스로 생을 마감할 계획까지 세우거든. 그만큼 ‘나’라는 존재를 잃어간다는 게 두려운 거야. (그래서 나도 뇌를 깨워준다는 게임을 시작했어.)
사실 Still Alice는 리사 제노바(Lisa Genova)가 쓴 동명의 소설(2007년 출간)을 원작으로 한 영화야. 리사 제노바는 원래 신경과학자인데, 알츠하이머병을 겪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현실을 깊이 이해하고 싶어서 직접 소설을 썼다고 해. 처음에는 자비 출판했지만,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면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결국 영화로까지 만들어졌지. 영화도 훌륭하지만, 원작에서는 앨리스의 심리 변화가 더 깊이 묘사된다고 해. 읽어보면 또 다른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데… 나는 차마 읽지 못할 것 같아.
무너져가는 그녀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반응도 현실적이야. 남편은 사랑하지만 점점 지쳐가고, 큰딸과 아들은 걱정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서히 거리를 두게 돼. 그런데 둘째 딸 리디아(Kristen Jaymes Stewart)는 달라. 원래는 엄마와 가장 부딪치던 딸이었는데, 오히려 끝까지 곁에 남아주거든.
앨리스는 처음부터 리디아를 이해하지 못했어. 언어학자로서 정확한 표현과 논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녀에게, 배우를 꿈꾸며 불확실한 길을 가려는 리디아는 답답한 존재였을 거야. 하지만 정작 앨리스가 언어를 잃어가고, 세상이 점점 낯설어질 때, 리디아는 다른 방식으로 반응해. 엄마를 원래대로 되돌리려 애쓰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하려고 하지. 마치 언어가 아니라 감각과 감정으로 소통하는 것처럼.
위의 영상을 보면, 리디아가 연극 속 독백을 천천히 읊어 내려가는데, 앨리스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봐. 공허한 눈빛이지만, 어딘가에서 단 하나의 단어를 찾으려 애쓰는 것처럼. 그리고 시가 끝난 후, 아주 힘겹게, 하지만 분명하게 말해.
"Love."
그 한마디가 내 안의 무언가를 무너뜨렸어. 기억이 사라져도, 사랑은 남는다는 것. 단어는 잊혀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오늘 하루를 기억하자.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고, 손을 잡고, 따뜻한 말을 건네자. 우리가 이 순간을 기억하는 한, 그래야만 우리가 여전히 우리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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