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다 전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우리는 매일 수많은 말을 주고받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은 고요 속에서 흐르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 있어. 사이토 하루미치의 《서로 다른 기념일》이야.


이 책에는 사이토가 그의 아들 이쓰기를 바라보며 목욕하는 장면이 나와. 이쓰기는 물속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고, 사이토는 그런 이쓰기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어. 그 순간, 사이토의 마음속에서 많은 말들이 흐르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 말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말로 전하지 않아도, 그 순간 이쓰기를 향한 사랑과 깊은 연결이 고요 속에서 흐르고 있었지.
이 장면을 읽으면서 나도 문득 깨달았어. 진정한 소통은 때로는 말 없이 이루어질 때가 많다는 걸. 사이토가 이쓰기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이었을 거야. 그 사랑은 고요 속에서 더 강하게 느껴졌겠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또 다른 이야기가 떠올랐어. 사이토와 그의 아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던 날이었지. 그날, 아내가 자전거에서 넘어졌을 때, 사이토는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어. 자전거를 돌려 급히 되돌아가면서 그는 얼마나 무력했을까. 소리 없는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다쳤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아찔한 감정. 하지만 그가 아내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친 순간, 말없이도 서로의 감정을 깊이 나눌 수 있었어. 고요 속에서, 그들은 오히려 더 깊이 연결된 거야.
이 경험은 사이토에게 소리 없는 삶이 결코 결핍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줬어. 그들은 소리 없이도, 말 없이도 서로를 더 깊이 느끼고 있었어. 이쓰키가 처음 걸음을 내딛던 순간, 아빠라고 처음 불렀던 그 순간, 함께 웃고 울었던 모든 작은 순간들이 그들에게는 특별한 기념일이 되었지. 그들의 일상은 소소하지만, 그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깊이 연결된 그들만의 기념일이 탄생하고 있었어. 그 기념일들은 말 없는 소통 속에서 더 빛났지.
그래서 《서로 다른 기념일》이라는 제목이 더 의미 있게 다가와. 소리와 언어가 없어서 오히려 더 가까워진 그들. 고요 속에서 흐르는 말들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념하는 그들의 날들. 오늘 나에게도 어떤 기념일이 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소리도, 언어도, 눈도, 귀도 다 있지만,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어서 오히려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리가 부족함을 느끼는 그 순간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라. 그러니 이제부터는 말이 필요 없는 순간들을 조금 더 소중히 여겨보려 해. 그 고요 속에서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정말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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